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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심리학자

by 숨만 쉬는 꿀벌 2022. 12. 12.

오늘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이름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였습니다.

프로이트는 억압과 무의식에 대한 방어 기제의 이론, 내담자와 심리분석가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시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치료 관계에서도 서로 간의 감정 전이의 이론, 내담자의 꿈을 듣고 내담자 속에 있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해석하는 치료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에 프로이트는 또한 뇌성마비를 연구하기도 하였습니다.

프로이트에서 따온 신프로이트주의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을 일부 수정하거나 삭제된 것이 많다. 프로이트의 관념과 은 임상 정신 역학 연구에서 중요한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 심리학자인 프로이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사회 과학에 지금도 공헌을 해오고 있다. 프로이트에 관해서는 여러 책이 있는데 우리 집에도 프로이트의 의자라는 한때 베스트셀러인 심리학책이 있다.

프로이트의 생애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프로이트는 원래 법 쪽으로 가려다가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의 의대에 들어가 카를 교수의 제자가 됐습니다. 왜 그가 의대를 택했냐면 괴테의 ≪자연≫과 다윈의 ≪종의 기원≫을 감명 깊게 읽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885년 파리에서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우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수개월 간 심리학을 연구하면서 주로 최면술과 히스테리적인 증상에 관심을 보였는데 이후 이러한 열정은 그가 정신분석학을 만들게 된 큰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프로이트는 수컷 뱀장어의 생식 기관을 공부하면서 오스트리아 동물학 연구소에서 한 달을 지냈으며 많은 것을 알아내진 못했지만 열심히 수백 마리의 뱀장어들을 해부하였다. 뱀장어를 먹지도 못하고 징그러워하는 나로선 프로이트가 대단하다. 그리고 이때 당시 뱀장어의 최대 생명은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 뱀장어들을 해부하고 연구한 결과 그는 "뱀장어의 정소"라는 논문을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 보고서에 옮겼는데, 여기서 그는 뱀장어의 생애주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밝혔다. 여기서 난 뭐라도 발견했을 줄 알았는데 천재도 역시 실패를 겪나보다 했다. 이 보고서에서 프로이트는 연구학자로서의 명성을 얻지 못하자 결국 자신의 분야를 바꾸게 된다.

프로이트에게 정신 분석이란
1885년 프로이트는 동료였던 유럽의 유망한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와 파리 출장을 갔다. 샤르코의 연구 분야는 히스테리 환자의 최면 감수성이었고 가끔 그는 열정적인 태도로 청중들이 있는 무대에서 직접 히스테리 환자를 초대하고 자신의 방법론을 시연하기까지 했다. 프로이트는 파리에서 돈도 많이 벌지 못하는 신경학 연구 대신, 정신 병리 치료로 진로를 바꿔 계기가 되었다고 자신의 책에서 회고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최면 기법을 꿈 분석과 자유 연상 기법을 밀어붙이게 된다. 이내 나중에 동료였던 샤르코는 자신이 헌신했던 히스테리 연구에 스스로 의문을 제기하면서 회의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1874년, 독일의 생리학자 에른스트 빌헬름 폰 브뤼케는 '생리학 강의'를 출간하여 "정신 역학"의 개념을 제안한다. 브뤽케의 '생리학 강의'에서 그는 살아있는 유기체는 하나의 역학계이며 화학과 물리학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급진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정신 및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적 심리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였다. 에너지 보존 법칙을 공식화했던 학자들 중의 한명이었던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와 공동연구 했던 그는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는 에너지-체계이며, 이 법칙에 지배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브뤽케는 비엔나 대학교 의대생이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교수였는데 이때 프로이트는 브뤼케의 "역학적" 생리학을 연구로써 받아들였다. 1879년 프로이트는 독일에서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잠시 연구를 접고, 복무 후 1881년에 논문 "하급 어류 종의 척수에 관하여"로 의학 박사(M.D.) 학위를 수여 여받는다. 역시 학자들의 길은 대단한 것 같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논문을 내놓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일일 텐데 자신의 연구한 것들을 토대로 새로운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행위이다.

40대에 접어든 프로이트는 심신증 장애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압박에 시달렸다. 아마도 우울증이었을까? 이 시기를 겪으면서도 자신을 분석했던 프로이트는 예전에 여의었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또 어린 시절 친절하고도 상냥했던 자신의 어머니 아말리아 프로이트에게 느낀 성적 감정을 상기하였다. 이 글을 쓰면서도 충격적이다. 이건 좀 아닌 듯 싶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자기 분석과 모은 자료들을 토대로 1899년에 비엔나에서 라이프치히와 공동 저자로 《꿈의 해석》을 출간하였고 정신학에 몰두하면서 후에는 빈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가 여러 가지 책을 출간한 이후 세계에서 프로이트가 내놓은 이론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였으며 프로이트 지지자 집단도 생겼다. 그 중의 지지자이기도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리 중의 한 명은 원래 프로이트의 생각을 지지하던 카를 융이었다. 카를 융도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다. 두 사람이 동료로서의 사이가 갈라진 이유는 카를 융은 신비적이고도 종교적인 탐구에 관심을 두었는데 이를 본 프로이트는 그런 행위는 비과학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 둘은 서서히 멀어졌다.

담배를 너무 좋아했던 프로이트는 후에 결국 구강암이 걸렸는데 이것 때문에 서른 번이나 수술받았다. 이런 병적인 것과 심리적인 우울감 때문인지 프로이트는 1939년 친구 의사인 막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 회유하였고 결국 막스는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끝내 완성하지 못한  미완성 저서가 있었고 1939년 9월 23일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영국 골더스 그린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은 많다. 유명했지만 결국은 친구에게 자신을 해하도록 설득했다는 것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인 것 같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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